2012년 12월, 까이에 뒤 씨네마 사설.
예전에 한 번역을 다시 읽어 봅니다.
해마다 관습처럼 발표하는 올해의 탑 10 영화의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2011년의 풍성했던 영화계 한해는 2012년에 들어서 거장들이 조금씩 거동하면서 모이는 일이 처음으로 있었는데 그 중에서 레오 까라는 첫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코폴라, 크로넨버그, 알렉산드르 소쿨로프, 그리고 2007년 <고고 테일스>이후 2011년 <4시간 44분>으로 오랜 침묵을 깨고 나타난 아벨 페라라와 갑작스레 나타난 혜성같은 감독들 (...)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알렝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누군가처럼>, 올리베이라의 <제보와 그림자>는 언급조차 안 되었거나 아주 조금만 알려졌을 뿐이다.
가장 잘 만든 영화부터 말하자면 영화들을 놓고 저울질하고 가늠하는 일에서 적잖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유는 칸 영화제 결산보고와 까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하네케의 <아무르>가 표지로 나온 까이에 뒤 씨네마 11월호 지면과 「레 젝스페르」 678호에 실린 "영화 평론의 정치적 입장"이라는 글에서 언급했었다. 영화 이외의 것로부터 영화를 옹호하기는 까이에 뒤 시네마가 취하는 변함없는 정책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화에 더 신중해야 한다.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본지에서 열거한 심각한 사제, 극단적인 기교, 대가 숭배같은 작가영화들이 가진 문제점들 10가지 중 현재의 영화들의 문제는 여러 항목에 해당되며 무엇보다 대가인 듯 무게를 잡고 클리셰들로 가득 찬 진실을 은폐하는 관습들에 있다. (중략) 까이에 뒤 시네마가 선정한 탑 10 영화리스트는 이러한 관습에 대담히 맞서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기다린다. 지난 달 포지티브지 사설은 잘 짜여진 똑똑한 영화들에 유감을 표명했다. 관객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생명력 없는 유능한 영화들을 왜 만드는가? 그저 자동차에 별점을 매기듯 영화를 평가하기 위해서 영화 평론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많은 영화들 앞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헛된 자문을 해본다. 작가영화는 무엇을 위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작가들이 카메라를 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잘 만들기만 한다면 (<다른 나라에서>의 이자벨 위뻬르의 경우같이) 여배우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도 나름대로 충분히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배우를 찍기 위해서는 그녀를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다시 보려할 사람은 누구인가?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창조하고 상대적인 시선을 만드는 일, 시간과 빛을 존재하게 하는 일은 공유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되리라. 얼굴(Visage)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시 구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