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비평사에서 작가라는 용어는 개념 자체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프랑스 비평지 까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이 본격적으로 제기한 작가이론은 영국, 미국으로 바톤이 넘어가면서 관객의 쾌락이란 작가의 텍스트의 패턴과 일관성을 찾아내는 것에 있다라는 작가주의로 변화했다. 홍상수 영화는 고전적인 한국 영화의 패턴에 저항하는 반영화 acinema의 특징을 뚜렷하게 내보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영화의 특징들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관객으로서 내가 영화를 보는 즐거움의 중요한 부분이 영화를 다른 사람과 같은 시점에서 보지 않는다는 자부심은 브랜드 레벨로서 작가 지위를 영화감독(메떼랑센 mettre en scene)에게 부여한다. 영화평론글을 쓰는 목적이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그 감독의 영화세계를 나만의 고유한 시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데에 있다할 때 작가주의는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 홍상수 감독은 한국영화작가들에게 수혜를 줄 수 있는 프랑스 까이에 비평단의 수혜를 입은 작가로 작가이론의 그러한 용도를 가장 잘 대변하는 예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맞고...>는 홍상수 감독의 열 일곱 번째 장편영화다. 이 열 한 자의 음절 수가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보다 딱 두 자가 더 많은 이 기나 긴 제목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만할까? 바로 전작 <자유의 언덕>과 대비해서 여섯자나 더 많은 이 제목의 급격한 경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홍상수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그런 깐깐함을 요구한다.
<지금은...>에서 '지금' 그리고 '그때'가 가리키는 시간은 선형적 시간을 벗어난 시간이다. 계열적 시간인 것이다. 즉 동시에 존재할 수 있지만 함께 존재할 수는 없는 시간인 것이다. 드라마화하지 않기와 사이를 보게 하기는 홍상수 영화에서 중요한 특성으로 구별되는 것이었다. 맞고 틀린지 명확히 판단할 수 없음은 데칼코마니처럼 반복되는 두 에피소드들에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판명된다. 영화에서 보듯이 어떤 장치들이 이 영화의 우연성을 발생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장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르는 듯하다. 첫째 드라마화하지 않기 둘째 그리고 사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홍상수가 택한 방법은 반복이다. 정확해 보이는 반복. 앞에서 행한 연기를 다음에 다시 그대로 되풀이하기. 과연 그런 미션이 수행가능한가를 책정하려는 듯이 영화는 전편과 후편에서 동일한 사건들을 동일한 순서로 되풀이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야심은 불가능하다.
이제껏 홍상수의 영화에서 시간은 선형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면 하나의 디제시스 내에서 서로 다른 현재들이 나타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에피소드 형식으로 분절된 터에야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걸리는 점은 이 영화가 홍상수의 이전 영화들과 맺는 관계다. <옥희의 영화>, <자유의 언덕>, <다른 나라에서>에서 보아왔던 비선형적인 시간성은 우리에게 사유의 여백을 가져다 주었다. 홍상수는 시간 그 자체에 대한 탐색을 끈질기게 이어온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