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의 시간 -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록시
이 시를 읽으면 빈 방에 고요히 떠다니는 먼지,
홀로 쪼그리고 앉은 여자의 뒷모습,
쓸쓸한 느낌이 드는 오후의 노란빛이 떠오릅니다.
더 어울리는 사진을 찾지 못해 아쉽네요.
저는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시를 좋아해요.
이 시는 장면이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지 않은데도
머릿속에 이처럼 선명한 이미지 하나가 떠올라 좋아합니다.
바쁘게 스팀잇하고, 일하던 중간에 보시면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할 일이 없고 마음이 쓸쓸하던 때 이 시를 읽었어요.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라는 첫 문장부터 마음을 후벼파더라고요.
"남아돈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쓸쓸하게 느끼게 만들고,
늘어가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살림살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게..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시인은 정말 대단하죠.
분명히 알고 있던 말도 완전히 다른 말처럼 바꿔놓잖아요.
누군가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는 표현을 썼다는데,
나희덕 시인은 그 표현에 참 잘 어울리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희덕 시인의 모든 시를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참 좋은 시집이에요.
시집 추천 글은 아니지만, 이 시가 마음에 다가갔다면
한 번쯤 서점에 들러 들춰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시간이 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로 넘어가고 있네요.
이 시간, 이 시를 본 분들의 마음에도 파문 하나가 남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