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ㅂ대학교 인문관. 르 코르브지에의 제자였다던 김중업의 초기 작품이기도 한 하얗고 긴 건물. 그 어깨죽지 끝에 누운 언어학과 전용과도 다름없는 316호 강의실에는 단 하나의 문 만이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지각은 절대 못하겠지. 출가 전부터 지금까지 수업 지각에서 예불 지각까지 한 번씩 다 해본 내게 만만찮은 과제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오늘은 다행이 정각에 문을 열었으니 세이프였다.
교실의 문이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시간을 확인한 뒤 문을 열기까지 몇 초 간 나는 "과연 학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라는 궁금증을 피할 수 없었다. 모교였던 ㄷ 대학교는 종립재단이었던 탓에 스님들이 너무 많았고, 유학했던 S국의 L 대학은 바로 옆 연방급 공대에 아시아인이 많았던데다가 우리 과에서도 외국인이자 비유럽인이 내가 유일했음에도 그들 특유의 '무관심함' 덕에 즐겁게 지냈더랬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고, 국민의 반이 무종교인이며, 나머지 종교인의 대다수는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이며, 개신교 신자들의 "일부"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 북감리교도의 베타성을 극대화한 버전이다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을 열고 교실을 향해 머리를 들자마자 약 40여 명의 90여 개의 눈동자들이 내게 맺힌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행히 1초도 되지않는 정적을 깨고 서둘러 구석자리로 옮겼다. 입장바꿔 생각해봐도, 우리학교 우리학부 12시 정각에 시작하는 "중관학" 수업에 앞문으로 신부님이 나타나면 되게 요상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그럼에도 몇몇 학생들이 힐끔거리는 것을 빼고는 재미있게 잘 끝났다.
수려한 말솜씨로 좌중을 희롱하면서도 가르칠 것은 꼭 가르치던 선생님은 20분을 우리에게 돌려주며 수업시작 55분 만에 수업을 마치셨다. 수업을 마치기 전 출석을 불렀지만 보충과목 수강자인 내 이름은 없었기에 소심하게 손을 들고 석사과정 보충과목 수강자인 이 누구누구누구 라며 속명을 이야기 했다. 그제서야 학생들 가운데 왠지모를 안도와 더 증가한 신기함이 내게 내리 꽂혔다. 수기로 출석부에 이름을 기입한 후 웃으며 "앞으로 스님 앞에서 많은 농담을 하게 될 것 같은데 너그러히 봐주세요" 라고 하시길래 미소로만 답했다. 농담이 농담이 아닌 사회라면, 불보살이 아니라 수라도 오지 않을테니까.
바람이 너무 불어 우산이 무의미한 오후였고, 첫 수업이 끝났다. 승려이기에 승복을 입고 살지만, 법명이 아닌 그간 잠시 내팽겨쳐두었던 이름으로 살아나가야 할 시간이 시작되었다. 괜시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