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부터 무기력한 기분이 나를 짓눌렀다. 보통, 우울한 감정과 무기력한 감정은 실과 반짇고리처럼 함께 다닌다. 그런데 최근에는 부정적이거나 우울한 감정이 없는데도 무기력해질 때가 있다. 어쩌면 우울해져 봤자 소용이 없다 생각해 우울해지지 말자라고 다짐을 한 후 우울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을 소거해버려서 무기력함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지난주 토요일 처음으로 집단 상담에 참여했다. 4시간가량 15명쯤 되는 사람들과 어색하면서도 친밀한 이야기를 제한적으로 얕고도 깊게 공유하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전반적으로는 좋았지만 내게 잘 맞진 않았다. 다시 참여할 마음은 아직 없다. 나는 완전히 지쳐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바람이 제법 차갑단 걸 집에 도착해서야 느꼈다.
저녁식사로 양배추, 미리 잘라놓은 파인애플, 요거트를 먹었다. 셋 중 무엇이 문제였을까?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요거트? 덜덜 떨다 들어온 주제 겁도 없이 온통 차가운 식단이 문제였을까? 빨래를 널고 한 시간쯤 지나자 머리가 바늘로 찌르듯이 아파왔다. 누워있는데도 통증이 낫질 않는다. 결국 참다 참다 변기를 잡고 구토를 했다. 30분 간격으로 3-4회쯤 했다. 여전히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팠다. 다 비워낸 것 같은데 아닌가 보다. 콧물도 나왔다. 따뜻한 침상에 누워 요새 들어 유독 자주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요일은 친척 오빠의 결혼식이었다. 가기로 약속했었다. 몸은 회복되었지만 도저히 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화장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모르는 사람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코트를 입고 밖에 나갔다가 감기에 걸릴 게 분명했다.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낮잠을 자다가 부모님의 불호령이 떨어진 묘한 꿈을 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엄마에게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남기니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알았다고 몸조리 잘하라고 했다.
아프다고 하니 남자친구가 집으로 왔다. 정말이지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잠만 잤다. 오전까진 아파서 그랬는데 오후부터는 아프지 않았다. 그냥 무력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 기력이 없다. 의욕이 없다.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전혀 없다. 내 미래도 취미도 당장의 쾌락도 대화까지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스팀잇도 귀찮고 책도 읽기 싫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싫지만 막상 나가는 것도 내키지 않는 답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
무기력한 나는 두 가지 상태로 나뉜다. 사소한 모든 게 두려워지거나 중대한 일도 한 없이 가볍다 못해 어떤 의미도 없이 느껴진다. 며칠 전까지는 모든 게 다 귀찮았다. 상견례 장소를 정하는 것도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이직을 하는 것도 스팀잇에 연재글을 쓰는 것마저도 귀찮고 어려워서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그야말로 어린애처럼 그저 주저앉아 울고 싶어 진다. 그럴 순 없으니 그저 외면하고 회피할 뿐이다.
어느덧 주말을 기점으로 나의 무기력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냥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다 의미가 없어지는 거다. 해야 할 일은 관성에 따라 한다. 모든 적극성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설레거나 기쁘지 않고 슬프지도 절망적이지도 않다. 안정이나 평화는 아니다. 결핍이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와 다를 바 없다. 활기, 명랑함, 열정은 모두 식어버렸다. 마땅히 누려왔던 충만함과도 마음을 쏟을 에너지도 모두 잃었다.
나는 오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처음 일을 시작하고 사람을 만났던 기억 여행에 다녀온 일 등 내 생애 전반을 조금씩 되짚어봤다. 그 어느 것도 중요하게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나를 만든 건 뭐지? 이 전부가 나를 구성하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모르진 않다. 그러나 그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떤 날엔 내가 이과를 가지 않고 문과를 왔고 이사를 한 번 하고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내 삶에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또 오늘 같은 날에는 내가 무얼 공부했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직업을 가졌든 그런 사실이 지금의 나와 하등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시 중요하고 절박하고 강렬했던 모든 과거의 고민과 고통은 대부분 사라졌다. 어렴풋이 잔상과 해석에 가까운 그 온전치 못한 기억은 그저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 모든 방식이 담아 나란 사람이 완성되었을까? 정말일까?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삶이 그냥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되는 대로 살아도 다르지 않을 것 같은 기분. 무얼 선택해도 괜찮을 것 같다. 여기서 애쓰고 고민해도 하루 동안의 고통과 괴로움 즐거움이 결국 나와는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무언가 기억과 내가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월요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 역시 월요병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월요일이 무기력에 꽤나 도움이 된다 사실을 깨달았다. 한 주가 시작되었고 습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처리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그냥 보통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일을 하듯이 사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을 처리해야 했고 처리하다 보니 어느 정도 열의가 생겼다. 다시 마음 속에 에너지가 느껴졌다. 스팀잇의 글도 읽고 싶어 졌고 책도 읽고 싶어 지고 이런 글도 쓰고 싶었다.
P.S. 시간이 없어서 퇴고를 못했다. 앞으로 수정하게 될 지 아닐 지 모르겠다. 거의 일기 쓰듯이 본능에 의해서 써내려갔다.
[안녕, 감정] 시리즈
01 입장 정리
02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
03 평화의 날
04 다름에서 피어나는 감정
05 아플 때 드는 감정
06 열등감 - part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