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쪽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에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나는 주관은 있지만, 그것이 가볍게 흔들리는 사람이다. 나는 특정 정치인과 정치 성향을 지지하지만 그것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스팀잇상의 여러 논란에 대해서도 함구한다. 어찌 보면 비겁한 내가 왜 이 아침에 이런 글을 쓰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오늘은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주위에 성소수자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특별했다기보다는 성소수자가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말이 더 맞을 듯하다.
어렸을 때 일이다. 가까이 지내던 지인에게서 새벽에 전화가 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미 울음에 젖어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고, 옆에 있던 지인의 친구가 대신 전화를 받아 지인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때가 새벽 세 시쯤이었고, 나는 대체 새벽 세 시에 오열하며 내게 전화할 일이 무엇인지 몹시 두려웠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택시를 타고 지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까지 지인은 친구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고, 지인의 친구는 나를 보고는 말없이 떠났다. 지인이 입을 떼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영문도 모른 채 지인을 달래줄 수밖에 없었고, 지인은 숨이 넘어갈 듯 울면서 할 말이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가 어렵게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나 남자를 좋아해."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깊은 안도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의 입에서 "사람을 죽였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만큼 심각하고, 무거운 새벽이었다.
내가 그때 그를 어떻게 달랬고, 어떻게 울음을 멈추게 했고, 어떻게 집으로 돌려 보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고, 그랬으니 아마도 잘 달래서 들여보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이때 처음으로 내게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친구가 생겼고, 그 이후로도 많은 성소수자를 만났다. 그들과는 지금도 가깝게 지내지만, 커밍아웃의 순간을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모두 숨 막힐 정도의 긴장감이 함께 했다.
작년 겨울, 동료와 얘기를 나누던 중 성소수자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동료의 지인도 성소수자인데, 가족에게 커밍아웃했다는 것이다. 그 집안은 무척 독실한 크리스천이지만, 지금은 자식을 편하게 받아들인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때 나는 그 이야기를 반만 믿었다)
그러던 와중 BBC에서 나온 자녀의 커밍아웃에 대처하는 부모의 자세 를 보게 되었다. (영상 링크 가져오는 법을 몰라 기사 링크로 대신했다. 기사에 있는 영상을 꼭 봤으면 좋겠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성소수자가 가족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성소수자 친구가 많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그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내 주변 성소수자들은 대개 장남, 외동아들이었고 대를 잇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부모님은 기성세대고,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으므로 당연히 가족에게 성소수자임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새로운 충격에 이 영상을 열 번 정도 돌려본 것 같다.
이 영상을 보고 성소수자에 대한 글을 찾아보다 성소수자 부모모임 을 알게 됐다.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소개는 이렇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가시화되면서 자녀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부모도 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부모모임은 자녀의 성정체성을 알게 되어 고민하고 있는 부모님들의 모임입니다.
나는 며칠간 시간을 내 이 사이트에 올라온 모든 글을 읽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정기모임 대화록 이었다. 2017년 1월을 기점으로 더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그간의 대화를 더듬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감사: 우리가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 존재만으로도 행복했잖아요. 아이가 두 달 뒤에 죽는다면 우리는 울어야겠죠. 하지만 이건 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운다는 건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거잖아요. 우린 잘못한 게 아니에요. 저는 전에는 이 정보도 아예 몰랐고 그랬는데, 이제 이해하게 되었어요. 아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알게 된 거잖아요. 말하자면 우리는 남자와 여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종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우리가 새로운 걸 알았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아이가 혼자 힘들어 했을 시간에 슬펐지, 아이가 이렇기 때문에 슬프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감정에서 나와서, 사회가 방치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아이가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 수 있을 지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여기 와서 말로만 듣던 걸 봐서 놀라긴 했지만, 슬프진 않았어요. 우리가 애를 키우다보면 애가 삐뚤어져서, 공부를 못해서, 이혼을 해서, 슬프기도 해요. 인생을 살다보면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잖아요. 이건 그냥 종류가 다른, 소수의 고민일 뿐이에요.
대화록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성소수자들이 가족에게 이해 받는 과정은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사회의 인정(認定)이었다.
나는 글들을 읽으며 내 부모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안에 담긴 이야기는 성소수자에만 한정되는 특별한(어떤 이의 논리로는 불결한) 것이 아니라, 위의 글처럼 '애가 삐뚤어져서, 공부를 못해서, 이혼을 해서'와 같은 류의 일상적 고민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소수자에게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를, 사회의 편견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조심스러워진다. 그들은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았고, 나는 어쨌건 '다수자'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양쪽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에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나는 주관은 있지만 그것이 가볍게 흔들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관의 문제도,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히 간단하고 당연한 일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렇기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사회 안에서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조금 더 자기 자신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