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24일은 강원도 양양으로 외할머니를 모시고 엄마와 작은 이모와 여행을 다녀왔다. 그 폭염에 야외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은 많지 않았다. 첫 날 낙산 해수욕장 부근에서 먹었던 회는 최악이었지만 10m 정도 거리에 있는 커피숍은 관광지 커피숍답지 않게 가성비가 훌륭했다. 3일동안 그 커피숍에 4번을 방문해서 시간을 보내는 기염을 토했다. 내 강력한 주장으로 꽤 거리가 떨어진 죽도 해수욕장에 가서 수제 햄버거를 샀다. 서핑을 하러 온 젊은 친구들 사이에 끼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를 보내고 나만 그들과 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심지어 여자 셋의 숙소는 양양 솔비치이고 내 숙소는 천해장 모텔여관이었지만 숙소로 돌아갔다. 엄마가 좋은 곳으로 잡으라고 했지만 잠만 잘건데 가장 싼 곳을 찾았다. 이틀째엔 낙산사를 방문하고 양양에서 유명하다는 막국수를 먹고 저녁에 맥주 한 잔을 했다. 양양으로 가면서 방문했던 횡성 휴게소에 다시 들러 한우 국밥과 떡갈비를 먹고 싶었지만 오는 길엔 홍천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고 여행은 마무리 되었다.
2박 3일의 일상에 무대만 바꾸어줘도 백만원 정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위의 일정이 어디를 봐서 백만원이 넘게 드는 여행인가, 하지만 이 모든 활동은 할머니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이다. 그러면 다른 소모는 무의미하지 않다. 할머니는 하루에 3시간 이상 기도를 하신다. 모든 가족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기도하시지만 큰 외손자 기도가 제일 길다. 좋은 꿈을 꾸시는 날엔 새벽부터 나에게 전화가 온다. 꿈 사러 오라고. 나는 만원씩 들고가서 할머니께 꿈을 산다. 아마 그 모든 꿈이 정말 어떤 계시의 일종이라면 모두들 나에게 잘 보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자랑할 것이 없는 나를 두고도 어디를 가면 큰 외 손자 자랑 뿐이다. 아무도 듣고 싶어할리가 없는 그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웃는 낯으로 들어주는 걸 보면 한국이 동방예의지국이 맞기는 하다. 외할머니가 95살까지 사는 것이 목표라고 하자 엄마와 이모가 놀랐다. 특히 우리 엄마는 놀랄 자격이 있다. 아침에 7시 30분에 아빠 출근시키고 매일 반찬 2가지와 국을 만들어서 할머니 가져다 주는 게 우리 엄마다. 한달에 할머니의 건강보조식품 값으로 40을 쓰고 할머니 집에는 골드키위와 사과는 항시 있고 계절 과일이 떨어지지 않는다. 두유와 저지방 우유도 있어야 한다. 나는 주로 롤케익이나 군것질 거리를 사다 드린다. 나와 아빠를 제외한 누구도 엄마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엄마는 돌아가신 친할머니께도 외할머니께 하는 것과 다름없이 진심으로 대했다. 세상 내 마음대로 사는 우리 엄마가 친가와 외가에 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 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엄마도 2년 후면 60이다. 할머니께서 95까지 사신다면 (현재 83세이시다.) 아니 그보다 더 사셔도 엄마가 하던 일은 내가 이어서 할 것이다. 그게 부모님께 받은 사랑에서 찾은 내 삶의 의미이다.
친할아버지는 전에 우려했던 것과 달리 치매 증세가 격해지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지신 느낌도 든다. 자주 찾아 뵙기로 마음 먹었으니 열흘 정도 사이에 두 번을 가서 뵙고 왔다. 대문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문은 3개인데 전부 활짝 열려 있었다. 우리가 온다고 전화를 드렸기 때문이다. 쇼파에 앉아 계셨다. 털털 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와 한껏 열기를 머금은 거실 바닥과 기다리시는 전화가 있는지 들고 계시는 핸드폰이 전부이다. 그 분의 일상을 무슨 수로 바꿔드릴 수 있을까 싶다. 사실은 바꿔 드릴 방법이 없다. 자주 찾아 뵙는 수 밖에.. 전에 쓴 글에서 오해를 좀 받았는데 나는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 돌아가신 친할머니에게보다 애정의 깊이가 깊지 않을 뿐이다. 예의 바르고 든든한 손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가 효자 효녀가 아니었으면 나는 할아버지께 지금보다 훨씬 적은 마음만 가졌을 것이다. 조부모에 대한, 특히 할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부모님의 그 것에 기인한다. 가령 벌초가 그렇다. 우리 산소는 40분 정도 올라가야 나오는 산 꼭대기에 있는데 예초기와 각종 짐을 들고 올라가는 것부터 군대 밖에서 할 일이 없는 활동이다. 돈을 주고 업체에 맡기면 그만인데 내가 그걸 하러 가는 이유는 함께 가는 아빠가 그 것을 직접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 뿐이다. 나는 아빠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 대부분의 활동을 한다. 할아버지가 그런 내 마음을 아시면 서운하실까? 할머니를 홀대하셔서 나에게 서운함을 품게 하셨던 할아버지는 지금도 큰아빠만 기다린다. 언젠가 그런 말은 절대 입에 안 담는 아빠의 입에서 "아부지는 그래도 형 밖에 없어"라는 말이 나왔던 순간을 기억한다. 야속하지만 표현할 수 없다. 89세의 노인이 그 아버지, 그리고 또 그 분의 아버지 세대부터 이어진 관습의 굴레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을까. 그건 할아버지의 착오라기보다는 시대의 착오가 맞을 것이다. 나는 큰아빠를 미워하지 않는다. 또 오해를 사긴 싫다. 나를 엄청나게 아끼시는 큰아빠를 내가 미워할 이유가 없다. 그 예전에 육사를 나오시고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으시다가 불의의 사건으로 군을 나오셨다. 사회에 적응을 힘들어 하시더니 지금도 삶이 많이 팍팍하시다. 내가 지금보다 여유가 있는 상황이면 아마 큰아버지도 챙겨 드렸을 것이다.
나는 스팀잇을 쉬는동안 글을 읽지 않았다. 간혹 들어왔을 때 일정 스크롤 범위 안에 '내가 꼭 챙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보팅하고 읽은 것이 전부이다. 바깥의 열기와는 다르게 이 곳은 좀 식었다. 식었다고 느끼는 순간 이전에 글을 쓰며 내가 내었던 뜨거움이 살짝 빛을 잃은듯이 보였다. 중요하게 보이던 것이 갑자기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게 가장 소중한 활동은 스팀잇이다. 나는 이 곳에서의 일을 부업이라든가 현실보다는 덜 중요한 안건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에 대해 숨긴 것이 없는 이상 스팀잇은 현실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곳의 친구들은 글을 쓰지 않을 때에도 나에게 위로가 된다. 모두들 꼭 만나보고 싶다. 만나보면 나도 그 사람들도 더 좋은 사람들일 것을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