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을 시작한 이후로 스팀잇을 제외한 모든 활동에 자유를 얻었다. 여러가지를 알게 됐는데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부모님이 내게 원했던 것이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평생 아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이었다. 늘 낭중지추라는 말을 강조하셨던 우리 아빠는 내가 나서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하셨다. 실속없는 감투쓰기와 대장놀이, 외양을 중요시하는 내 성향은 아빠와 반대였고 그 것을 방조한다는 이유로 엄마와도 자주 다투셨다. 엄마의 생각은 '본인이 능력껏 하겠다는 모든 일에 최대한 밀어 주겠다'였고 아빠는 '본인이 내실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줘야한다'였다.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언제나 대장 언제나 1등이었다. 공부는 당연히 잘했고 싸움을 몇 번 해보지도 않고 일진이었으며 늘 이쁘다고 소문난 아이와 사귀었다. 공부의 한계를 느낀 건 고등학교를 가서였다. 내 두뇌 활동의 한계였다기보다는 공부 하기를 비정상적으로 싫어하는 내 성향의 확인이 영향을 미쳤다. 평범한 편에 속하는 내 두뇌로 공부란 심오한 이해였기보다 반복과 숙달의 과정이었는데 반복 과정이 지루해 미칠 것 같았다. 모두가 시험 범위를 딱 1번만 보고 시험을 보면 상위권을 차지할 자신이 있었지만 시간 안에 누가 더 그 것을 숙지했는지 평가하는 싸움에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본질이 아닌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본질이 아닌 것에 집중한 시기는 무려 10여년이다. 썩 원치 않던 대학에 입학해 더욱 원치 않던 생활을 하던 나는 점점 아빠와 멀어졌다. 막연히 평범함과 무난함을 내게 바라시는 줄 알았다. '하면 할 수 있다.'에서 '하면'이 나에게 가장 힘들다는 것을 아빠도 어느 순간 눈치 채셨다. 내려놓으실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그 사이 살까지 미친듯이 쪄 있었다. 총체적 난국에서 엄마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셨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지원해 주셨던 과거가 고난 앞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아들을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스타트업의 그늘 아래 했던 활동들은 진심이자 위장이었다. 실제로 개발한 것이 없어도 프로토타입을 들먹이며 기술적 구현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을 적시하고 그럴 듯한 아이디어를 소개하면 상금을 주고 지원금을 주는 '창업경진대회'들은 내 입장에서 또 다른 나를 보는 기분이었다. 실재가 없이도 실제로 무언가 있는 척 하는 삶. 선의와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멋진 창업가도 많이 보았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을 수단화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었다. 하고싶은 말과 하고싶은 일들은 남아 있었지만 내가 수장이었던 창업팀은 와해시키고 두 분의 투자자와 하나의 기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취업을 하지 않기 위한 구실로 창업 활동을 2년 넘게 하였으나 그마저도 제 취향이 아닌 듯 하여 그만두었습니다. 창업 활동을 하는 동안 해외 여행은 실컷 했다. 여기서도 보내주고 저기서도 보내준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 늘 개발도상국 쪽을 택해서 갔다. 몽골, 네팔, 베트남, 캄보디아 그리고 실리콘밸리를 다녀왔다. 닥터스트레인지가 그랬듯이 나에게 깨달음을 줬던 여정은 네팔에 있었다. 아빠는 물었다.
"이제 뭘 할 생각이냐"
"인터넷 방송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해봐라"
방도 구해주고 장비도 전부 사주셨다. 나는 컨텐츠를 확정하지 못 했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시작을 미루었다. 420만원 짜리 커스텀수냉PC로 글만 쓰게 된 건 3월 13일에 스팀잇 계정이 승인난 이후부터이다. 방송 시작은 그 사이 더욱 연기되서 12월 1일쯤 시작하려고 한다.
요즘 아빠는 기분이 좋아보인다. 아들이 충주에 내려와 있어서 그런가? 내가 충주에서 그냥 눌러 살겠다고 선언해서 그런가? 내 글이 가치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글쓰기를 망설인지 보름 정도가 흘렀다. 내 스팀잇 계정도 알지 못 하는 아빠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글쓰기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신다. (아빠는 나보다 아는 것은 20배 정도 많고 글은 10배 정도 잘 쓰시지만 말은 5배 정도 못 하신다) 한 여름 밤의 도라지 위스키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은 김작가님과 나의 아빠이다. 내가 최백호를 아는 건 아빠의 노래 취향 때문이니 말이다. 아빠가 고등학교 시절 야자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 밀고 갔던 이유는 밤 12시에 학교 옥상에서 '밤하늘의 트럼펫'을 연주해주던 밴드부 선배 때문이었다. 나는 일상과 성실함과 한결같음으로 요약할 수 있는 아빠의 삶에 익숙해져 아빠의 낭만을 잊고 있었다. 어제 맥주 한 잔을 하고나서 (아빠만)담배를 피우시며 말을 건내셨다.
"너만의 기록을 어딘가에 남기고 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아빠를 봐라 60이 되도록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돈을 벌고 모으고 필요하다는 이들에게 주고.. 이제 니가 자리 잡는다면 나도 내 삶을 살아보고 싶다"
나는 멋쩍은 웃음인지 찡그림인지 모를 표정 밖에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쓰기로 했다. 나는 끝없이 나를 살피겠다. 부족한 통찰력을 가리기 위한 수사에 지쳤다. 나를 소재로 한다면 수사 없이도 글을 쓸 수 있다. 쉬운 것만 찾아서 적는다면 논리의 비약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 내 무능이 탄로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스팀잇의 독자들은 감시자가 아니라 동반자라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나는 날짜에 의미부여 하기를 좋아하는데 오늘은 7월의 마지막날, 아빠의 마음을 알게 된 다음 날, 내가 글쓰기만큼이나 하고 싶은 방송을 시작하기까지 4개월이 남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