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가 푹 자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 했다. 아파서 잘 수 없었다. 아픈 곳은 한 두 부위가 아니었으며 뼈마디까지 쑤신다는 말은 그녀의 상황에 매우 적합한 표현처럼 보였다. 초저녁부터 눕지만 도무지 몸을 가만히 두지 못 한다. 끙끙대고 앓고 몇 시간이고 앉아 있기도 하고 끓이고 있는 사골 국물 때문에 부엌을 다녀오기도 했다. 내가 가면 겨울에는 붕어빵을 20마리씩 사오시곤 했다. 악에 받쳐서 사시는 분, 매일 울고 계속 욕을 하고 줄담배를 피우시며 죽고 싶다는 말씀만 하시던 분인데 나에게는 흔한 핀잔조차 주신 적이 없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고 남편은 바로 6.25에 참전했다. 1년 후에 사망 통지서가 왔고 그녀는 그래도 시집에서 빠져 나가지 못 하고 갖은 고생을 하다가 사망통지서가 도착한지 3년 후에 남편이 살아 돌아왔다. 무뚝뚝하고 공감능력은 전무하며 효자인 남편. 그녀는 출산하고 몸조리도 제대로 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시부모와 이 부부가 큰 방 하나에서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상상도 못 하겠다. 집에서 시내버스로 한 시간을 가야 하는 논과 밭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고 돌아 오는 길에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싶다고 해도 못 들은 척 하던 남편과 평생을 사셨다. 2010년 겨울의 어느 날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입원하셨다.
"아무리 바빠도 가서 이틀 자고 간호해 드려라"
원래도 아빠 말을 어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 말을 어기지 않은 것은 평생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해야할 일 중 하나는 기저귀를 갈아드리는 일이었지만 한사코 거절하셨다. 결국 이틀 뒤에 엄마가 와서 갈아 드렸다. 얼마나 찝찝하셨을까.. 나보고 책을 편히 보라고 병원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켜주셨다. 그녀는 병원 침대에서도 역시나 잠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다녀가고 2주가 채 되지 않은 새벽에 연락을 받았다. 장례식장엔 주로 아빠와 엄마 손님이었다. 노인들은 그나마 할아버지 지인분들 이셨다. 온전히 할머니의 손님은 누구일까, 살펴 보았지만 나는 찾지 못 했다. 화장을 해달라는 것이 할머니의 바람이셨다.
할아버지는 이틀 전에 치매 검사를 받고 오셨다. 하루 전에 다녀간 나에게 전화를 하시더니 요즘 왜 이렇게 안 오냐고 하시는 말씀때문에 알았다. 나는 할아버지를 할머니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는 자장면이 먹고 싶다는 할머니 말씀에도 못 들은 척 뒷짐지고 앞에서 걸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 신발 뒷굽을 구겨 신고 터덜터덜 따라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담겨있다. 보지도 못 하고 말로만 들었던 장면인데 생생하다. 나는 그 장면때문에 할아버지를 할머니 이상으로 좋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두 번 뵙고 오는 것으로 다른 손자들보다 효도한다고 자위하던 내게 할아버지의 그 전화는 충격이었다. 당장 이기적인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이보다 더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까' 충주로 모시고 오자고 엄마한테 이야기 했다. 문제는 엄마가 아니라 할아버지였다. 죽어도 이 집에서, 내 방에서 죽겠다는 할아버지의 태도는 완강하셨다. 나는 몇 일간 내 글을 쓸 수 없었다. 낭만에 대한 글을 하나 써보려고 했었는데 머리가 하얗다. 대회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서 어디에도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부서져 버린 이 느낌을 하소연 할 곳도 이 곳 뿐이다. 할아버지가 기억을 잃어 가시는데 왜 할머니 생각이 더 나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아프신데 왜 할머니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할머니 기저귀를 못 갈아 드린 일을 후회하진 않지만 내가 할머니께 해드린 일이 뭐가 있었나 싶어 할아버지께 할만큼 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크게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나에게 그 정도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나도 적정선에서 할 수 있는 것들만 하겠지. 속이 참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