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글을 써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境界線)을 경계(警戒)하면서 살아갑니다.
경계선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 뿐만 아니라 경계선 너머를 쳐다보는 것 조차 큰 두려움입니다. 교육, 제도, 문화 등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경계선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작년 개봉영화 중에 김훈 원작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무능한 왕과 대신들의 생각과 결정에 민초들이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는 모습을 러닝 타임내내 드러내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장면은 청의 통역관으로 나온 조선인 정명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청의 장수에게 이조판서 최명길과 영의정 김류가 함께 찾아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청의 장수를 만나기위해 최명길과 김류그리고 청의 통역관인 정명수가 함께 걸어가는 중, 영의정 김류가 정명수에게 같은 조선사람끼리 이러면 되냐며 다그치자, 정명수는 나에게 '조선사람'이라고 하지 말라며 자신은 조선에서 천민이었고, 천민은 조선에서 사람이 아니었다고 답합니다.
병자호란으로 인조는 청나라에게 굴욕을 당하고 우리 백성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입장에서 정명수는 배신자일 수 있지만, 정명수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국경지대에서 천민의 신분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던 그는 자신이 국경선이라는 경계, 오랑캐나라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위를 보장 받았습니다.
내가 만들어 놓지 않은 신분제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현실을 감내하고 살거나, 경계선을 넘어보거나 하는 방법 두가지 밖에 없었고 그는 과감히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원한 것은 결국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경계선을 넘는일이 쉬웠을까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만들지 않았던 제도 속에서 나의 노력과 무관한 금수저, 흙수저의 차이에서 오는 현실의 괴로움을 토해내며 살고 있습니다. 경계선을 넘고 싶어도 어디가 경계인지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고 돌아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그렇게 늙어 죽어가게 됩니다. 가난의 대물림, 신분의 대물림을 극복하지 못하면서요...
이제 다른 스토리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일본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나를 보내지마 (Never let me go)'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마치 데미안과 같은 고전 성장 소설과 비슷한 문체로 진행되는데 소설의 줄거리는 장기이식을 목적으로 길러진 복제인간들의 인간성과 사랑, 성장에 대한 내용입니다.
복제인간들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느끼고 사랑하고 고민하고 즐거워하는 똑같은 인간이지만 태어날때부터 그들에게는 성인이 된 후 '장기기증'이라는 목적성이 있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그들에게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책의 마지막까지 어느 누구도 단 한번도 경계선을 넘는 행위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못하는 것으로 그려졌다는게 맞을 것 같네요. 로이스 로우리의 더 기버(The Giver)나 영화 매트릭스(Matrix)처럼 경계선을 뛰어넘는 스릴을 이 책은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우리 모두 이 책의 복제인간들 처럼 우리의 목적성과 삶의 가치를 교육과 제도라는 틀에서 강요받고 살고 있음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는게 맞을까요?
어쩌면 우물안 개구리의 인생이 더 편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물 밖에 뭐가 있는지는 확인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우선 나를 옥죄는 경계선이 무엇인지, 나한테 좋은지 나쁜지, 그것부터 찾아보는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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