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의 제1중대는 첨병중대가 되어 계속 전진했다. 묘향산 기슭에 도착하여 청천강을 가로 지르는 여울을 만났다. 청청강을 건너는 여울에는 승용차 22대를 포함한 차양 100여대가 버려져 있었다. 미제 및 소련제 고급 승용차도 있었고 소련제 가스트럭과 미제 지엠시 군용차등 가지 각색의 승용차가 서 있었다.
청천강을 반쯤 지나가다가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고 물속에 서 있었다. 파괴된 차들을 피해서 지나가려던 차들이 수심때문에 발동이 꺼지게 되자 꼼짝 달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쫓기던 북한군들이 차들을 모두버리고 두주한 것이었다. 중대 선임하사관 김상사에게 제일 좋은 차를 타고 북상을 할테니 골라서 따라 오라고 지시하고 강물에 빠져 길을 막고 있던 차량들을 밀어내고 다시 북진을 계속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때 노획한 차들중에는 김일성의 차도 있었고 주한미대사 무쵸의 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뒤따라 오던 제6사단의 지휘관들이 이 노획 자동차들을 하나씩 둘씩 가지고 갔다. 김일성의 차도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졌다.
진격하는 북한군 탱크 1대를 포함하여 자동차 백여대 기타 군수물자들을 어마어마하게 확보했다. 포로는 너무 많아서 장교들과 하사관들만 후송하고 나머지 명사들은 무장만 해제하고 큰길을 따라 고향으로 가라고 석방했다. 노획한 적의 권총은 모두 배낭에 넣었으나 소총은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소총의 공이를 빼서 땅에 파묻던가 덤불에 버렸다. 공이가 없는 소총은 땅에 파묻던가 덤불속에 버렸다.
그날 늦게 숙명여대생 1명을 포함한 북한군 여자 의용군 40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김지용 상사가 보고해왔다. 김상사의 보고에 의하면 이번에 잡은 북한군 여자 의용군들은 적십자 병원 간호학생들과는 달리 불순분자라고 했다. 이들은 국군에게 쫓기어 달아나는 북한군을 보면서 “저런 바보들이 어디 있어, 이쪽을 보고 마주 총을 쏘면 될텐데 왜 저렇게 도망을칠까”라고 하며 패주하는 북한군을 책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풍문여중 3학년인 박필숙과 북청출신의 김복희가 가장 불순하다고 했다. 이대용은 15살 20살 짜리가 무엇을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반항적인 의용군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연대 정보과로 후송조치시켰다. 이대용은 기회를 봐서 직접 설득해보리라 생각을 했다.
10월 23일 새벽 5시 20분 주먹밥 한덩어리에 고추장과 단무지그리고 어제 노획한 소련제 초콜릿이 배급되었다. 밤톨모양의 초콜릿안에는 꿀이 들어가 있었다. 6시 30분에 진격을 시작했다. 회천 남방고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을 했다. 적은 모두 후퇴했다. 여기저기서 부상병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대용은 부상당한 북한군 병사들을 빨리 후송하라고 했다.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북한군 병사를 보았다. 카라멜을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그는 고마워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황해도 신제라고 했다. 부모님이 계시냐고 물어보니 “예”하면서 눔물을 흘렸다. 이대용은 “울지마라, 상처입은곳이 치료되고 나면 곧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위로했다.
여기에지에 총에 맞고 대포에 맞아 피를 토하고 죽은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어떤 북한 병사들은 얼마나 괴롭게 죽어갔는지 쥐어 뜯은 갈대들을 한손에 쥐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귀신도 잡아 죽일 것 같이 용맹스러웠던 김금동 중사도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슬프게 서 있었다.
대대에서 희천시내로 내려와 휴식을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솔길을 따라 희천 시내로 묵묵히 내려왔다. 중대 선임하사관 김지용 상사의 지시로 박태숙과 정정훈이 밥과 된장국을 해 놓았다. 오늘부터 박태숙과 정정훈이 이대용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이대용은 어색하긴 했지만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했다.
마침 김상사가 어제 청천강에서 노획한 승용차를 타보라고 가지고 왔다. 쿠션이 좋은 고급 승용차였다. 희천을 두바퀴 돌고 나니 대대장이 연대장을 통해 사단장에게 선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대용은 이차를 사단으로 보냈다. 나중에 김종오 장군은 이차를 무초대사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대용이 노획했던 차는 무초대사의 차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