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팀잇에 글을 쓰기 시작한지 100일과 200일째가 되는 날에는 기념하는 글을 남겼었는데, 300일이 되는 날은 훌쩍 흘려보낼 정도로 오래 떠나 있었다. 재개를 하려는 생각은 정말 매일같이 했으나, 마치 파퓨아뉴기니의 어느 구석으로 떠나온 사람이 비치 의자에 앉아 유유하게 뇌까리는 수준의 다짐이었다. 그쯤 되면 다짐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렵겠지. 물론 돌아오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으나, 그게 꼭 오늘이어야 한다는 마음은 다소 희미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쓰고 싶고 쓸 만한 소재는 원래와 마찬가지로 넘쳐났다. 밥을 먹다가도 생각나고, 자면서 뒤척이다가도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집어들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지금 당장 쓰고 싶은 것은 뾰족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글로 (리)스타트를 끊어야 할지의 문제가 그 자체로 상당한 무게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냥 쉬지 않고 매일 썼다면, 무엇을 먼저 쓸지의 문제는 아예 문제로서 존재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일기로 근황과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가장 만만한 방법이었겠지만, 가장 먼저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공교롭게도, 서문만 기록한 상태인 이 [W: 내 글쓰기에 대한 시리즈]에 가장 적합한 내용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간만에, 입에 잘 대지도 않는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이렇게 끄적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좀 더 근황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글은 토라진 고양이 숀(1화 보기)이 오전 중에 제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그간 글을 쉬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원래도 글을 읽고 고치는 일이 내 주된 업무였고, 그 일은 내가 직접 내 글을 쓸 때만큼이나 '나'를 많이 드러내는 작업이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손을 많이 댄 글은 아예 내 글이다. 하지만 그 글의 내용을 구성한 '알맹이'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글로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 것이다. 만일 내 판단을 거쳐서 내 스타일대로 바꿔버린 글이 내 이름을 달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이 일을 계속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내 아이디어로 시작하지 않은 글에는 그런 미련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내가 아주 좋아하는 또 한 종류의 작업은 자서전인데, 그건 아예 고치는 차원을 넘어선 내 글이지만서도, 주인공의 삶과 시각 자체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괜한 미련을 갖지 않게 된다.
이쯤에서 이 시리즈의 이름이 W인 이유를 잠시 상기해보자. 그 누구도 누구에게 글을 '어떻게'(How) 쓰는지를 알려줄 수 없다고 전제하고,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왜(Why) 등을 의미하는 W의 문제들은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그 누구든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떨 때(언제) 그리고 어디서 글을 쓰고 무엇을 어떤 이유로 쓰는지는 당연히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발상이었다.
어쨌든...내가 애초에 남의 글을 편집하게 된 계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의 친구가 영문으로 서술한 한 단편 소설에 도달하게 된다. 내가 문단들을 통째로 들어내고 난도질을 심하게 한 남의 글, 편집을 거치기 전에는 종합대학으로 나름 좋다는 서부의 C대에도 못 들어갔었으나 편집 후에는 문학과가 엄청난 포스를 자랑하는 동부의 C대에 덜컥 합격하게 된 글이다. 그렇다고 해서 편집자의 자부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이미 언급했듯, 그 글을 구성한 알맹이가 내 것이 아니니까.
스팀잇에 쓰는 글은 내가 마음 가는대로 쓰는 유일한 글에 속하기도 하지만, 유일한 한글이기도 하다. 일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내가 일로서 다루는 글은 전부 영문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한 달 넘게 스팀잇을 쉬는 동안에는 한글로 다른 종류의 글을 거의 매일 쓰고 원고료를 지급 받았다. 기존의 원고를 고치는 게 아니라 직접 쓰는 글이니까 분명 내 글은 맞는데, 주제와 방향은 의뢰인들이 구체적으로 정해주는 그런 글.
뭐 그런 글은 너무나도 영혼이 없는 글이고, 마음껏 쓰는 스팀잇 글이 너무나도 그리웠고 좋다는 식의 뻔하면서도 센티멘털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난 닭살돋는 기승전결을 싫어하거니와, 애초에 글 자체를 우상시하는 태도 역시 싫어하니까. 내가 정말 중시하는 것은 어떤 글을 쓸 수 있는 역량이지, 글 자체는 아니다. 생각을 해볼수록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가령 반 고흐가 그림을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릴 수 있는 영감과 잠재력과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가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그 가치를 누군가 가늠하거나 알아주진 못했겠지만, 타인들이 인식 가능한 가치와는 별개로 어떤,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절대적 시각을 상정하는 쪽이라고 봐야겠지. 신의 시각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뭐 그런.
그 어떤 역량이 존재하든 간에 그걸 보여주는 결과(그리고 실행력)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정반대의 생각도 물론 일리는 있지만, 어쨌든 내 생각은 다르다.
논지가 좀 샜지만, 스팀잇을 쉬는 동안 내가 의뢰인들의 요구에 맞는 글을 쓰면서 자괴감을 느꼈다거나 하진 않았다는 얘기다. 당연히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아니었지만, 그 일을 하는 기간 동안에도 원래와 마찬가지의 심적 여유를 주는 생활을 했고, 내가 즐거워하는 스토리들을 제공해주는 매체들을 즐겼고, 바다를 보고 하늘을 봤다. 글로 내 생각이나 감정들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내 생각과 감정들이 퇴보하거나 멈춘 것은 아니었다. 대신에 조만간 다시 내가 원하는 글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잔뜩 키워두기도 했다. 그래서 내 정신세계는 그런 주문형 원고들을 써내는 기간 동안에도 행복했던 것 같다. 내가 써내는 글과 별개로, 나는 여전히 나였으니까.
결국 그 일은 최근에 그만두었다. (그래서 스팀잇에도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차피 잠시만 하려는 의도로 시작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두는 순간만큼은 딱 하나의 이유만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글을 쓰는 과정이 너무나도 재미가 없어졌다는 이유였다. 다른 말로 하면, 초반에는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낯선 경험이라면 그 자체로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면이 내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재미는 그 일이 익숙해질 때 쯤에 사라진 셈.
약 1주 전에 그만두었는데, 그 해방감의 여파로 펑펑 놀고 수많은 마카롱을 먹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런 식의 보상도 글쓰기와 절대적으로 관련이 있다.
어쨌든, 의뢰인들의 원고가 개인적으로 아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글이라서 그만두었다기보다는, 단순히 재미가 너무 없어서 일찍 그만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스팀 가격을 보면 그 일이 훨씬 쏠쏠한 벌이였으나, 낯선 것에 대한 재미가 사라지니 정말 꼴도 보기 싫어졌다고 해야 하겠다. 이럴 때 보면 나는 정말 쾌락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아주 많은 행동들이 재미를 이유로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스팀잇에 글을 쓰는 재미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잠시 숨겨두었던 꿀단지를 찾아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다.
사실 그간 원고와 스팀잇 둘 다 병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은 2019년 나 자신에 대한 복지 공약이었고, 앞으로도 관련 정책들을 더욱 강화할 생각이다. 참고로 그 일을 건당 분량으로 따지자면, 내가 스팀잇에 써온 글 중에서 가장 긴 글의 몇 배였다. 그것도 거의 매번. 초반에는 1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분량을 뽑아내는지 혼자 내기하는 재미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원고들을 갖고 의뢰인들은 영업을 하고, 비싼 무언가를 파는 데 사용했다. 어느 의뢰인이 내게 원고의 퀄리티를 칭찬했을 때, 나는 "네에..."로 무심코 응수했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데자뷔 현상이었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칭찬 받았을 때 "아 네"로 답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거만해서가 아니라 그냥 별로 그것에 대한 평가에 관심이 없어서 나오는 답변인데, 막상 내 그 답변에 당하는 사람은 매우 당황하곤 한다. 좀 옹졸한 사람의 경우, 기껏 칭찬해줬는데 그딴 답변을 하냐며 파르르 떨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외적으로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글을 칭찬 받는다고 해서 내 가치가 갑자기 올라간다곤 생각하기 어렵다. 나는 신생아가 아니기 때문에 발전이 더디고, 앞으로도 더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 살아가려면 극복해야 할 슬픔이다. ㅋㅋ
어쨌든, 스팀잇 글을 제외하고도 한글로 (나름) 대량의 원고를 뽑아낸 경험도 거치게 된 것이다. 이 점 자체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스팀잇을 쉬기 전부터 계속 밖에서 하는 일도 하고 싶다는 타령을 종종 했었는데, 그 부분 역시 조만간 실현될 예정이다. 혹시라도 밖에서 나와 마주칠 분들이 있을까봐 업종은 명시하지 않겠지만, 재미있는 일을 하루에 몇 시간씩 할 생각이다. 너무 많이는 곤란하고, 다섯 시간 정도. 이유가 있다면,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화면으로 글을 보고 고치거나 글을 쓰는 데 할애하는 패턴을 바꾸고 싶어서이다. 나는 벌써부터 노년을 대비해서 독서를 오디오북 듣기로 점차 대체하고 있는데, 마찬가지 맥락에서 장시간 화면 보는 일을 조금 줄이려고 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읽고 쓰는 일을 오래 해야 하니까. 길게 가기 위해서 가늘게 가려는 것인데, 개인적 소감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사실 최근에도 문서작업 위주의 일을 하나 의뢰받긴 했는데, 한국어를 오디오로 들으면서 영문으로 옮겨 적는 일이다. 이건 키보드 세팅만 좀 주의하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라 부담이 덜하다.
하루를 체계적으로 써서 정해진 일들을 해야겠다. 잠은 많이 자고, 1일 1식은 느슨하게 지키고, 매일 스팀잇 글을 최소 1회 쓰고 싶다. 또한 (매일은 아니겠지만서도) 너무 오래 생각만 해두었던 메디팀 영작과 더불어 문학 번역도 할 생각이다. 사실 아퀼라 프로젝트는 다른 인원들이 나 이상으로 바빠서 그간 거의 진전이 없었는데, 진행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내가 일을 많이 분담하면 되리란 생각이다. 혹시 출판사의 계획 변경 등으로 인해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다른 저작권 소멸된 문학작품을 연재해볼까 싶기도.
사실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글쓰기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학생 때도 거의 글을 다루는 일만 했다. 공부든 아르바이트든 말이다. 따라서 글과 상관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분배해서 글을 쓰는 상황은 앞으로 처음으로 겪게 되는 셈이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글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다. 좌충우돌이 될지, 새로운 밸런스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혹시 전자라면, 다시 집에서만 일하는 삶으로 돌아가야겠지.
이상, 대범한 척 하지만 항상 안전망을 두고 움직이는 나라는 사람의, 아주 적당하기만 한 포부였다. 뭔가 살짝 졸렬한 것 같지만, 글이라는 것을 생업과 생활로 많이 다루다 보니까 생기는 가냘픈 생각들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p.s. 나름 복귀 신고인데 마우스가 뻑뻑하다. 새로 사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