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kangsukin입니다.
대학시절 교양 수업을 통해 읽게 된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에 대한 개인의 생각입니다.
저는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존중은 합니다.
2010년 쯤에 이 글을 썼으니, 시간이 참 많이 흘렀네요.
개인적으로 이 글을 다시 읽게 되고 느낀 건, 과거에 나에 대한 가치와 생각과 대학 시절의 기억들이네요.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하여, 이글을 옮겨봅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저자 이어령은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다. 교수, 장관, 문학박사, 논설위원, 평론가 등 종횡무진한 그의 삶 때문인지 이번에 나온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책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소재로 다가왔다. 저자를 처음 알게된건 ‘디지로그’라는 책을 통해서다. ‘디지로그’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회가 융합하는 시대의 흐름을 말한다. 그는 아직도 디지털 시대의 기술 발달과 그로인한 부작용을 아날로그인 감성을 통해 보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의 어느 한 신문기사에서 저자는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애플의 아이패드에 ‘나라면 전자북에 종이향기가 나도록 하겠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는 늙은 노장이지만 정보사회의 선두주자, 개척자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무신론자였던 저자의 종교 입문기를 그린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기존의 종교 서적과는 달리 무신론자에게 거부감도 없을 것 같았고, 그가 기독교 신자가 된 계기가 무엇인지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실존주의, 허무주의로 성서를 비판하던 이어령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일본 교토 연구소에서 지내던 시절과 딸의 암투병을 통한 고통을 접하면서다. 물론 종교와 신의 존재를 부정하던 그이기에 세례를 받고 기도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6.25 전쟁 때 신은 어디에 있었던 거냐며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고 비판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딸이 병으로 고통을 받자 딸의 얼굴을 내일 또 볼 수 있게 해준다면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다는 간절한 기도를 한다. 또한 그는 일본 교토의 연구소에서 홀로 지내면서 외로움을 통해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생각했다고 한다.
저자도 그러하듯 누구든 한번쯤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얼마나 진심이 담긴 것인지 종교적 믿음이 강한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게다가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은 언제 멸망할지 모를 환경오염과 질병, 전쟁, 식량난 등에 허덕이고 있다. 크게는 지구 종말을 걱정해야 하고, 작게는 나의 가족문제, 주변 인간관계, 내일, 모레의 일들에 대해 잘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두 가지 형태의 해결방법을 생각한다. 첫째는 나 자신을 믿고 주변 사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둘째는 신의 존재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긍정적 마음을 갖는 방법이다. 물론 두 가지 방법을 융합하는 사람도 있고, 두 가지 방법을 망각한채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성과 이성, 영성 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영성을 가진다는 것은 꼭 종교를 가져야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도 내면속에는 모두 다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것이 외형적으로 표출되는 계기에 따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 일뿐이다.
저자에게 지적이고 냉철함을 가져야만 일을 할 수 있는 법조인 딸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남부럽지 않은 좋은 환경에서 잘나가던 딸이 갑상선 암으로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작은 외손자가 ADHD라는 행동과잉장애로 고생하는 모습과 엎친데 덮친격으로 딸이 망막이 손상되어 눈이 흐릿해지는 과정을 아버지로써 고통스럽게 보게 된다.
결국 딸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한없이 연약하고 절실하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체감하고 종교적 믿음을 가지게 된다. 저자의 지식이나 돈이나 아버지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 아버지로 밖에 갈 수 없었고, 간절한 믿음은 그토록 힘들었던 딸의 병이 완치되었다는 기적을 낳았다. 물론 이러한 기적 때문에 저자는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믿음을 통한 신념과 긍정적 마음가짐을 통해 이루어진 성과인 것이다.
저자는 지금도 100%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만큼 살아오면서 가지던 가치관이나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에 대한 생각도 꼭 기독교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마치 한 남자가 부인을 선택할시 주변사람이 왜 그 여자를 선택했냐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종교선택은 자신의 배우자를 만나는 것처럼 운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어느 종교를 믿어야만 한다고 강요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종교를 정하고 그를 통해 인생의 방향을 잡고 믿음을 가지면 충분한 것이다.
지성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고찰과 탐구를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영성은 일관된 자기 조각을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를 통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태도를 방황 없이 만듦을 의미한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현대 시대이지만,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 사후세계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현실 세계의 문제는 과학자와 저명한 학자들이 풀어가지만, 죽음에 대한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 경험한 사람이 없기에 종교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삶과 죽음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종교밖에 없다.
저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한다면 조수석에 타면 한곳의 창밖만 볼 수 있지만, 운전자가 되면 좌우, 앞의 전반적인 상황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통찰된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통해 하늘에서 지상을 보면 전체적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듯이 종교를 통한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전체적 삶을 볼 수 있다.
이어령은 초월적 힘을 ‘Something Great’라고 했다. 딸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과 아픔이 치유된 것은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화려한 경력 뒤에는 아버지에 대한 딸의 외로움이 있었다. 항상 바쁜 아버지로 인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변호사가 된 것이 아버지에 기쁨을 주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는 딸의 고백은 그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성공한 한인으로 인정받고, 자가용 요트에 호화롭게 여행하며 사는 딸이 행복한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리고 딸은 아버지가 주지 못한 사랑과 외로움과 고독함을 종교를 통해 치유했고, 이후의 3번의 암과 각막손상이라는 고통도 물론 이겨냈다.
인간이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생명의 질서가 있다고 한다. 동물들이 탄소를 배출하면, 식물은 그러한 탄소를 통해 산소를 만들어 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순환을 통해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한다. 이러한 균형을 가지고 삶을 만끽하는 곳은 우주에서 보면 지구밖에 없다. 그것이 끝없이 절망하고 부조리하지만 생명 자체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아무리 불행해도 행복하다. 숨쉬는 것 하나만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살아갈만한 것이다. 저자는 금전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이제는 생명자본주의가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만큼 우리는 종교와 믿음,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감사하고, 생명의 윤리를 통해 겸손함과 감사함의 마음을 가지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