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 접하던 누군가를 직접 만나면, 이상하게도 그 사람과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이다. 쓴 글들이 모여 그 사람을 구성하는 것 같다는 느낌. 실은 그 반대일 테지만 말이다. 김중혁 작가는 글뿐만 아니라 여러 방송에서 접하며 평소 친근하다고 느끼던 작가다. 토크 콘서트에 간 적이 있고, 며칠 전에는 창의력, 창작을 주제로 하는 특강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김중혁 작가는 창의력, 창작 활동을 ‘공간’과 연결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창작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설명하며, 그 공간은 정돈되어 있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예정된 시간이 끝나고 작가는 한 영상을 꼭 함께 보고 싶다고 하며, 애플의 크리스마스 광고 영상을 보여 줬다. 영상에서 한 아이는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손에 늘 핸드폰을 쥐고 있다. 가족이 모인 크리스마스, 아이는 그동안 자신이 찍어온 영상을 가족과 함께 본다. 가족들은 아이를 안아 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줄 알았던 아이가 알고 보니 사람들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상 자체에서 큰 울림을 받지는 못했는데, 이후 작가가 한 말이 좋아서 수첩에 적어 내려갔다.
“예술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발짝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록하는 사람이다.”
평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강연장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작은 공간,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정성스레 이야기를 이어가던 작가의 모습이 따뜻하고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강연이 끝나고 누군가 질문을 했다. 선생님, 영화도 좋아하시나 봐요. 나는 그 질문이 엉뚱하게 느껴졌는데, 작가는 영화를 좋아한다며 두 시간 동안 꼼짝없이 봐야 하는 게 좋다며 한참을 말했다. 어떤 질문에도 허투루 답하지 않았다. 왜 안경을 쓰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답했다. 김중혁 작가의 글이나 말에서 위로받은 적이 많았는데, 어쩌면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마침 김중혁 작가의 특강에 찾아가기 전날, 나는 <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반쯤 읽었다. 며칠 전 비 오는 날 서점에서 산 책이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책을 마저 읽었다.
표지에는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이란 말이 쓰여 있는데, 사실 대단한 비밀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작가가 삶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지속하며 어떠한 태도로 대하는지에 관한 에세이 모음이라고 보면 좋겠다. 창작의 비밀 따위는 없었지만,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많아 몇 번이고 밑줄을 치며 읽었다.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은 얻지 못했어도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제목의 주문에 휩쓸려, 진심으로 무엇이든 쓰고 싶은 용기와 힘을 얻었다.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 남들과 다른 어떤 것을 만들려고 하는 순간, 스스로 벽을 세우는 셈이다.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래 하다 보면 특별해진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특별하고, 시간과 함께 만든 창작물은 모두 특별하다. 286p
무조건 열심히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게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창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예전에는 “작가님은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어요?”라는 질문이 어처구니없게 들릴 때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 막막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어이없는 질문도 하게 되는 것이다. 287p
아마 우리가 만든 창작물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조차 놀라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만드는 사람이고, 창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의 그 어느 조직보다도 끈끈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를 만들기로 작정한, 창작의 세계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당신을 존중한다. 하찮다고 느껴지는 걸 만들었더라도, 생각과는 달리 어이없는 작품이 나왔더라도, 맞춤법이 몇 번 틀렸더라도, 그림 속 사물들의 비율이 엉망진창이더라도, 노래의 멜로디가 이상하더라도, 나는 그 결과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건투를 빈다. 288p
마지막으로 인용한 글로, 책은 끝난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창작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얻는 위로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무엇이든 쓰고 싶다. 열망이 점점 커진다. 읽는 게 행복하고, 쓰는 일을 행복하게 여기고 싶다. 보잘것없는 내 글 앞에 ‘아직은’이란 말을 붙이고 싶다. 김중혁 작가의 말대로, 오래 해서 특별해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