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비가 내리기 전까지 붕 떠 있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줬다는 이유만으로 울고 싶을 만큼 마음이 따뜻해졌었다. 그 때문에 해야 할 일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멍하니 있다가 동네 서점으로 향했다. 마침 지갑 속에 문화상품권 몇 장이 있어 무작정 책을 사고 싶었다. 문학 코너에서 책 몇 권을 골랐다. 읽고 싶었던 소설,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읽지 못했던 소설, 새로 나온 소설을 느릿느릿 집었고 글쓰기에 관련된 책도 골랐다.
한 해 전만 해도 기분 전환할 겸 서점에 들르면 인문사회 코너를 기웃거렸다. 한때는 문학이 전부인 것처럼 느끼기도 했는데, 회사 생활에 쫓기다 보니 자연스레 멀어졌었다. 문학이 뭔 소용이냐며, 당장의 지식, 정보에만 매달렸다. 업무 관련 전문성도 높여야 했고 무엇보다 어디 가서 아는 척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전보다 시간이 여유로우니 다시 문학의 세계에 슬그머니 발을 들이게 됐다. 오랜 시간 곱씹으며 읽는 소설 한 편이, 정말 소중한 것임을 하루하루 깨닫는다. 문학이 주는 깊은 울림, 삶이란 한 번 살아볼 만한 것이란 느낌을 주는, 그 울림이 벅차다.
문학의 힘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있다. 재작년인가, 친구가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어봤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다. 주위에서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그때부터 길고도 긴 내 ‘읽을 책 목록’에 넣어두었다가 최근 손에 넣어 읽는 중이다.
문유석 판사는 책에서 자신이 철저한 개인주의자임을 밝힌다. 또한, 자신을 “기본적으로 이타심이 크지도 않고, 인간애가 넘치는 휴머니스트도 아니”라고 소개한다. 자신의 삶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그는, 책에서 “내 일이 아닌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양극화, 빈부격차, 취업난, 온갖 부정의한 일들에 대한 고발과 고찰이었다. 제목에서 기대한 바와는 달리, 그는 “사회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끊임없이 서로 대화한다면 더디더라도 옳은 방향을 향해 갈 것”이라고 말한다.
역시, 누군가에게 권할 만한 책이었다. 개인의 삶과 행복을 위해서는 ‘우리’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걸 책을 읽는 내내 곱씹었다. 책 전체의 큰 맥락에서 조금 빗겨나 있는 듯한 짧은 글 한 편이 마음에 남는다. ‘문학의 힘’이란 제목의 글이다.
문유석 판사는 “나이 먹어가며 점점 순문학에서 멀어진 느낌”이라고 말하며, 어느 겨울 다시 소설을 읽으며 했던 생각을 풀었다. 제목 그대로 ‘문학의 힘’에 대한 내용이다.
좋은 단편을 찾아 읽는 것은 쇠약해진 ‘문학 근육’ 단련에 좋은 듯하다. 문학적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법관에게는 더더욱 필요하다. 심리학이든 다른 어떤 학문이든 결국 인간의 여러 특성 중 범주화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추출해서 보여준다. 문학은 그보다 훨씬 풍부하게 인간의 개별성, 예외성, 비합리성을 체험하게 해준다. 후자에 대한 이해 내지 상상력 없이 이루어지는 재판은 침대 길이에 맞춰 인간의 신체를 절단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전락할 수 있다. 154p
대중의 분노는 즉각적이고 선명한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법관으로 일해온 경험에 비춰보면 실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기사처럼 몇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냉정한 ‘팩트’ 집합으로 보이는 신문기사보다 주관적인 내면고백 덩어리로 보이는 문학이 실제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을 더 잘 설명해 줄 때가 많다. 155p
소설이라는 공통의 넓은 풍경
한 달쯤 전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었다. 하루키를 처음 읽었을 때처럼 두근대는 신선함과 설렘은 이제 더는 없지만, 여전히 내 문학서랍 어디쯤 하루키의 영역이 남아 있었다.
아침에 찬 우유에 시리얼 한 그릇씩을 먹으며 읽었는데, 짧은 글과 함께 하루의 시작이 조금은 특별해졌었다. 그의 일상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읽으면, 내게 일어나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제각각 멋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거란 착각이 들곤 했다.
부담 없이 책을 읽다 어느덧 마지막 장에 다다라, 좀 더 천천히 읽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음악과 소설의 ‘기능’에 대한 내용에서 나는 멈춰 섰다.
역시, 소설을 읽어야 해, 같은 생각과 함께.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21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