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사후 소련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졌다. 이와함께 중국도 소련의 변화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는 중국 상황에 적합한 노선을 취사선택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변화와 다른 입장을 취했다.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은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정웅, 리준항 집필, 장경률 편집, 조선로동당의 반수정주의투쟁경험,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5, 61쪽)
1956년 4월 23일-29일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자주적인 대외정책을 주장했다. 안팎의 정세가 복잡하지만 우리 식대로 살아가며 주체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박영실 212)
소련은 북한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개인숭배문제를 거론하려 했으나, 북한은 소련과 맞섰고 그 과정에서 소련문화를 유입하던 기능의 조선대외문화연락회의 기능이 축소되었다. 1956년에는 전쟁기간중에도 이루어졌던 ‘조소우호의 달’ 행사마저 최소되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 기간과 그 이후에 김두봉, 최창익, 박창옥, 박의환, 서휘, 윤공흠, 김승화 등 일부가 조선노동당 내의 개인숭배 상황, 간부정책 및 경제방침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김일성의 잘못을 폭로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다.(션즈와, 저 최만원역, 430쪽)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이 리필규, 박창옥, 최창익, 김승화, 윤공흠 등을 통해 사전에 김일성 제거계획을 전해 들었고 이 사실을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이 사실을 들은 김일성은 전원회의 소집을 지연시키고 소집일자를 하루전에 공포했다.
(의문 여기에서 왜 소련대사관은 김일성에게 김일성 제거계획을 알려주었을까?)
8월 30일 시작된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 겸 상업상인 윤공흠이 제3차 당대회에서의 개인숭배에 대한 처리방식에 대한 김일성의 과오를 비난했으나, 최용건, 허성택 등 당주류파가 윤공흠의 발언을 저지하면서 소란이 벌어졌다.
토론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은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소련파인 김승화역시 김일성에 대한 반대토론을 준비했다가 거절당하자 급히 소련으로 떠났다.
다음날 회의에서 최창익은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과 중앙위원에서 제명되어 내각 부수상에서 파면되었고, 박창옥은 내각부수상과 기계공업상에서 해임되었다. 윤공흠 역시 상업상에서 파면되고, 서휘는 조선직업총동맹중앙위원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리필규도 내각건재공업국장을 잃게된다. 이들과 관련있는 당원들은 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에서 심의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리상조는 9월 5일 소련 외교부 차관 페도렌코에게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조선로동당 문제에 개입하여 주기를 요청했고, 소련과 중국공산당은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회에 참석했던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와 소련 제1부수상 미코얀을 북한에 급파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당중앙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김일성 축출을 단념한 대표단은 8월 전원회의에서 처벌당한 사람들의 복권문제만 다루는 선으로 정리되었다.( 박영실212-215)
1956년 9월 23일 다시 열린 전원회의에서 중국과 소련의 압력을 수용하여 처벌과 조치를 취소하는 결정을 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올린이:admin2019년 1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