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는 스탈린이 중국 동북진출이 마오쩌둥에 의해 좌절되지 그 대체지를 한반도에서 찾으려고 했다고 보고 있다.
스탈린은 제정러시아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확보했던 태평양 진출을 위한 출구와 부동항을 확보하려 했다. 소련은 1944년 12월 14일 자신들의 요구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1945년 2월 8일 스탈린과 루즈벨트의 회견과 얄타협정을 통해 확인함
이후 스탈린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지하고 마오의 공산당 혁명활동을 저지하는 태도를 보임
스탈린은 소련군을 중국 동북지역에 투입하여 장개석에게 중소동맹조약의 서명을 강조
중소동맹조약은 30년으로 중국장춘철로에 관한 협정, 따리엔에 관한 협정, 뤼순항에 관한 협정 등과 같은 부속협정이 그 뒤를 이음. 이는 제정러시아가 러일전쟁이후 상실한 중국 동북지역의 모든 권리를 소련이 회복하는 것을 의미
스탈린은 국민당정부를 통해 제정러시아의 권리를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활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보고 있음
“마오쩌둥이 홍군을 이끌고 창정을 거쳐 샨베이에 도착해서 소련 및 코민테른과 관계를 회복할 때 까지, 중공과 소련의 관계는 일종의 상호불신과 비협조적인 상태에 처해 있었다.”(81)
스탈린의 이런 행동은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단서는 션즈화의 책(82)에서 찾을 수 있다.
“1942년 2월 옌안에서의 정풍운동, 당의 형식적인 지시,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에서부터 1945년 4월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이 제기될 때까지의 목표 중의 하나는 당 내에서 소련 세력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주적으로 중공의 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각주 69에서 후챠오무는 후일 마오쩌둥 사상을 제기한 것은 전 당을 사상적으로 통일시켜, 소련공산당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휘를 벗어난 소련의 독립적 경향…. 그리고 옌안정풍운동은 소련 지도자들의 중공에 대한 불만과 선입견을 더욱 심화시켰다. 바로 이런 인식을 전제로 스탈린은 1944년 6우러 22일 미국대표 해리만과의 담화중 “중공은 진정한 공산당이 아니어서 일단 경제상황이 호전되면 공산주의를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다”(82)
이렇게 보면 스탈린은 중국 국민당이나 중국 공산당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 공산당의 지휘를 거부하는 중국공산당은 오히려 문제거리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국민당과 내전을 실시할 때 대도시탈취를 고려했다(84). 그러나 마오쩌둥이 그런 전략을 수정한 것은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중국에서 내전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원과 원조가 없을 경우 중공의 역량만으로는 공세적인 전략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8월 21일 샹하이에서의 봉기 방침을 수정하고, 8월 22일 중공중앙과 중안군사위원회는 대도시 점령 계획을 철회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모택동 연보 하권 9-10, 85)
중공은 신속하게 동북지역에 진입해 좀 더 광범위한 농촌지역과 중-소 도시들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9월 초가 되자 샨하이관 서쪽에 있던 중공군이 지리상의 이점을 이용해 신속하게 동북지역으로 접근.
중공군이 동북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소련의 적군과 충돌하는 현상도 발생함.
소련군은 동북지역으로 팔로군이나 장개석 군대가 모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입장을 피력함.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동북지역문제에 대해서는 소련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힘(90)
당시 소련의 동북지역에 대한 입장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자신들의 동북지역에 대한 제정러시아의 권리를 승계하는 것이었음. 그러나 그것이 바뀐 것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때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