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지원군의 북한철군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김일성의 권력장악의지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그것은 이미 소련의 보고서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북한의 역사를 어떻게 기술하는가하는 문제는 중요한 맥락이 될 수 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1956년 8월 종파사건과 이를 전후한 북중관계는 지금의 북중관계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1958년 중국군의 철군이후 정상화되었다. 그 이후부터 1990년까지의 북중관계는 일반적인 성격을 넘지 않았다. 1990년 냉전종식이후 한중관계가 정상화되면서 북중관계는 악화되었다. 북한의 핵개발은 북중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중국으로서도 북한이 핵을 가지는 것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북중관계를 순망치한이니 또는 혈맹이니 하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매우 관계가 멀다. 문제는 한국과 미국이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중국인민지원군의 북한철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이 김일성의 투쟁의 성과임을 적시한 것은 소련의 분석보고서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과 미국에서는 북중관계의 역동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한국에서 발간된 조선일보의 평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958년 2월 19일 철군에 대한 북한과 중국에 대한 성명이 발표된 다음날인 2월 20일 조선일보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북한과 중국은 유엔군이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둘째,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으로 양국의 비용이 절감된다.
셋째, 북한정부는 중국이 철군하더라도 중국의 명령에 복종한다.
넷째.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은 압록강을 넘어서는 것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다시 투입될 수 있다.
한국은 당시 북한과 중국간의 정치적 상호관계에 대해 어떠한 이해도 없었던 것이다.
그점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58년 3월 17일 미 국무부 정보조사 분석국의 보고서에서도 북중간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다.
보고서가 밝힌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의 선전공세를 언급하며, 한국문제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재점화하여 극동문제를 다룰 고위급 회담에 중국을 참가시키기 위해
둘째, 한국에 원폭을 보유한 미군과 남한의 이승만에 의한 무력통일이라는 호전적 발언과 평화를 강조하는 공산측의 행동을 대비하기위해
셋째, 1958년 5월 예정된 남한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정부적 자유당의 지지 약화와 남한내 반정부적 감정을 증가시키기 위해
넷째, 북한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철수를 요구한 유엔 결의안을 준수하여 유엔회원국 자격을 요구하는 중국의 입장을 강화시키고, 침략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와함께 소련이 중국과 북한의 성명을 환영한 것은 남침의 배후로 거론되었던 소련이 이런 침략자 레벨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미국무부 정보조사국 한국관련 보고서 5, 2003, Intelligence report No. 7687)
미국과 한국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발표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철군하더라도 언제라도 다시 한반도에 들어 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선전선동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1958년 중공군의 철군으로 이어지면서 북한이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