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정세는 중국이 군대를 철수시키기에 적절한 상황은 아니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북한은 소련 및 중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북한의 내부 정치상황을 무시하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철수시키기 어려웠다.
이와함께 한반도의 안보상황도 안정되지 않았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은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1957년 6월 21일 중국은 유엔군이 정전협정 제13조를 위반하여 새로운 무기를 남한에 반입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상황이었다. (인민일보 1957년 6월 28일)
북한도 중국군의 철군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1956년 6월 1일 북한은 군병력을 감축시키고자 했다. 1956년 8월 31일까지 약 8만명을 감축시키고자 했으며 그 이유는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인력전환이 목적이었다.
북한이 군대 병력을 줄인 것은 그만큼 중국군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문제는 8월 종파사건이 북한의 중국군에 대한 입장을 완전하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서동만과 와다하루끼는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건설의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철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동만,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598쪽)
(와다하루끼 서동만 남기정 역, 북조선, 돌베게, 2002, 120쪽)
김용현은 중국 내부의 문제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용현, 북한의 군사국가화에 관한 연구, 1950-1960년대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81-82쪽)
한편 1966년 소련 외교부가 작성한 6.25 전쟁평가보고서는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군대가 장기간 주둔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결국 북한의 압력으로 1958년 10월 말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철수”했다는 것이다. 또한 1958년 3월 당조직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김일성이 ‘소련식 군사단일제’와 ‘중국식 정치위원제’가 북한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이원제를 실시하자는 제안을 제시한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화, 조선전쟁 아국당안관적해밀문건 하책, 대북, 1992년 1348쪽)
(서동만,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807쪽)
결국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은 국내적 정치기반을 확보하였으며 이어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을 계기로 중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은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중국에게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스탈린이 휴전협상의 권한을 마오쩌둥에게 넘겨준 것은 중국에 대한 북한의 우선권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스탈린 사후에는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볼때 1958년 중국군의 철수는 북한이 진정한 의미에서 외세로부터 해방된 시점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소련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퇴조하고 그 이후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김일성이 국내정치적 기반을 장악하고나서 1958년 중국군이 철수하게 된 과정을 하나로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중국군이 철수하게 된 것도 결국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1957년 모스크바 공산당대회에서의 회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정치적 흥정의 댓가라는 것이다. 중국은 더 이상 북한에게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올린이:admin2019년 12월 12일